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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사 50년]시험에서 떨어지면 회사가 사라졌다
작성일 : 2026-09-07 11:43:47
출처 : 택스워치

③원로 관세사들 회고에 담긴 '그때 그 사건들'

관세사의 역사는 단순한 자격사 연혁이 아니다. 외국인이 통관을 주도하던 시절부터 국가에서 인정하는 전문 자격증을 가진 직업(국가전문자격사)의 탄생, 업무의 컴퓨터화(전산화), 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인공지능(AI) 시대까지, 국경을 넘는 물건을 누가 판단하고 책임질 것인가를 둘러싼 변화의 역사다. 한국관세사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관세사의 뿌리와 역할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짚어본다.

관세사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세관화물취급업자(통관업자)가 통관 업무를 했다. 여인찬 관세사의 회고를 보면 당시 통관업자 허가는 정부가 숫자를 제한해 신규 진입이 쉽지 않았다.

신고서도 전부 손으로 작성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업계가 1976년 관세사제도 시행을 계기로 크게 흔들렸다. 이미 정부 허가를 받아 통관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새로 만들어진 관세사 자격을 취득하도록 시험을 치르게 하면서다.

지역 협회장을 맡고 있던 여 관세사는 정부와 국회를 직접 찾아가 항의했다고 회고한다. 결국 기존 통관업자들을 대상으로 특별전형시험을 치르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결과는 혹독했다. 여 관세사의 기억으로는 부산의 기존 통관업자 가운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2~3명에 불과했다. 일부 구제조치가 이뤄졌지만 끝까지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폐업해야 했다.

여 관세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회사가 없어져야 하기 때문에 경쟁이 대학 입시만큼 치열했다"고 했다.

세관화물취급인 자격증. [출처: 한국관세사회]

"좋아했죠. 당당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같은 관세사제도의 출범을 두고 김동수 관세사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기존 통관업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통관업자가 전문자격사로 격이 올라간다는 기대도 컸다는 것이다.

관세사제도 설계 과정에 참여했던 김 관세사는 일본·대만·필리핀은 물론 미국의 통관제도까지 살펴봤다. 특히 일본에서는 통관사가 단순한 업무 대행자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의 관세사제도도 이런 해외 사례를 참고해 틀을 잡아갔다.

1976년 제1회 관세사 시험에서는 60명이 합격했다. 누군가에게 관세사제도의 출범은 평생 해오던 사업을 걸고 치러야 했던 생존 시험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통관업자라는 이름을 벗고 전문자격사로 올라서는 출발점이었다.

손으로 쓰던 신고서가 사라졌다

한국관세사회는 관세사제도가 도입된 다음해인 1976년 관세사 자격을 취득한 59명이 중심이 돼 창립총회를 통해 출범했다. 당시 창립총회 모습. [출처: 한국관세사회]

관세사 업무에 또 한 번 큰 변화가 찾아온 건 1990년대다. 여 관세사의 회고처럼 이전까지 관세사들은 세관에 제출할 수출입 신고서를 일일이 손으로 작성했다. 여 관세사는 제도 전환 이후 가장 큰 변화로 '전산화'를 꼽았다.

전산화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관세사들도 직접 해외 사례를 찾아 나섰다. 1991년 강재운·김광수·성백운·이용준·홍용기 관세사 등은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해 EDI(전자문서교환) 방식의 통관전산화 제도를 직접 살펴봤다.

이후 국내에서도 수기로 작성하던 신고서를 전산망을 통해 세관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통관 업무가 바뀌기 시작했다.

다만 전산화에는 비용이 뒤따랐다. 전산망을 이용할 때 내는 통신요금이 관세사들에게 새로운 부담으로 떠올랐다. 당시 관세사회 전산위원으로 활동했던 김무용 관세사는 통신업체와 요금 인하 협상에 나섰다고 한다. 당초 목표는 통신요금을 30% 낮추는 것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수출 신고는 70%, 수입 신고는 30%까지 요금을 낮췄다. 

협상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김 관세사는 당시 치열했던 논의 과정을 떠올리며 "오늘 집에 안 가도 좋으니 토론해서 결론을 냅시다"라고 했던 일화를 전했다.

"왜 관세사만 독립법이 없나"

관세사들의 숙원은 또 있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독립된 법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세무사와 변호사, 공인회계사는 각각 별도의 법률이 있었다. 하지만 관세사는 관세법 안에 몇 개 조항으로 자격과 업무 등이 규정돼 있을 뿐이었다.

결국 현업 관세사들이 직접 움직였다. 1994년 이용준·김광수·강재운·성백운·홍용기 관세사가 독립 관세사법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국회 재정위원장실을 드나들며 법 제정 필요성을 설명했다. 법 공부 경험이 있던 이용준 관세사는 세무사법과 변호사법 등을 참고해 관세법 곳곳에 흩어진 관세사 관련 조항을 하나로 모아 법안의 초안을 짰다. 이 관세사는 "우리 5명이 기초 짜고 만들고 건의하고, 다 한 거예요"라고 회고했다.

초안은 관세사회 이사회에 보고됐고, 관세청과 정부를 거쳐 국회를 설득하는 작업도 이어졌다. 1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1995년 관세사법이 독립 법률로 제정됐다.

지난 3월 열린 제50차 한국관세사회 정기총회 모습. 정재열 관세사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1990년대 EDI 통관 자동화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관세사회가 주도하는 AI 통관 플랫폼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출처: 한국관세사회]

※참고자료: 한국관세사회 발간 『무역강국의 숨은 주역 관세사 50년사』